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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마당] 은혜를 아는 민족

한국전 72주년을 맞으며 미군의 희생에 대해 생각한다. 미군은 약 3만7000명이 한국전에서 전사했다. 장병 뿐만 아니라 사령관이 전사했고 사단장이 포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장성들이 자신의 아들 142명을 참전시켰고 그들 중 35명이 전사했다.     전쟁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시골 병원이었던 우리 집에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길게 늘어선 행렬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군 입대 면제를 받기 위해 진단서를 받으려는 젊은이와 그를 데려온 부모들의 줄이었다. 자기 나라 전쟁인데도 말이다.     나는 미군의 희생과 그에 대한 감사를 마음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사는 한인이나 단체가 봉사활동을 할 때 노란 유니폼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영어로 적을 것을 제안한다. ‘미국에 감사한다. 우리는 한국전 미군 희생자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은혜를 아는 민족인 한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자긍심도 커질 것이다. 애국정신 고취와 후세 교육 효과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라구나우즈 시니어 단지에서는 행사 때마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게양하고 앞에 언급한 문구를 적은 배너를 설치한다. 이를 본 미국인들은 고마움을 잊지 않는 한인들이 오히려 감사해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혼자 외롭게 사는 미국인 할머니 등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우리 이웃에 많지만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이 불쑥 찾아가긴 쉽지 않다. 그래서 앞의 문구를 쓴 명함 같은 것을 만들어 한국전 때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함이라는 말하면 자연스럽게 도울 수 있다.     한국인은 지구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볼 수 없는,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정을 가진 민족이다. 이런 활동은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면서 보람찬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김홍식 / 은퇴의사독자 마당 은혜 민족 민족인 한인 한국전 미군 한국전 72주년

2022-06-26

[커뮤니티 포럼] 6·25전쟁 75주년을 맞으며

# 금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 72주년이다. 3년간 계속된 전쟁의 피해는 막대했다. 군인 희생만 해도 국군 사망자 수는 13만7899명, 부상자 수는 45만742명, 포로는 8343명이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 북한군의 인명 피해 규모는 더 컸다. 유엔의 결의로 참전한 유엔 16개국의 군인도 3만7902명이나 전사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단호한 결단에 의해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인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유엔 결의 이전에 한국 땅을 밟은 미군은 연인원 180만명에 이르고 그중 3만6691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종자, 부상자, 포로 등의 수는 십수만 명에 달했다.   워싱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글귀대로 ‘알지도 못하는 나라, 또 만나보지도 못한 국민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젊은이들이 이역만리에서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바로 대한민국에 민주, 자유, 평화, 인권과 번영을 선사하기 위해서였다. 한국민들, 특히 미주에 사는 한인들은 미국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2009년, 박동우씨가 백악관 직속 장애위원회 위원(차관보급)으로 임명됐다. 워싱턴을 방문하면서 ‘내셔널몰(National Mall)’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찾아 헌화했다. 거기서 그는 베트남전 참전 기념비에는 전사자들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는데 한국전 기념비에는 전사자 이름이 전혀 기록돼 있지 않은 것을 알게 됐다.     그때 박동우씨는 그가 거주하는 남가주에 한국전 미군 참전 전사자의 이름 전부를 새겨넣은 기념비를 세우자고 결심을 한다. 그 후 뜻있는 이들과 힘을 합쳐 ‘미군 참전용사 기념비 건립위원회’를 조직했다. 마침내 작년 11월 11일, 풀러턴시 힐크레스트 공원에 5개의 별 모양의 비(碑)에 미군 전사자 3만6691명의 이름을 모두 새긴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기념비’ 준공식을 갖게 됐다.     #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린다. 그것은 2차세계대전과 베트남전 사이에 끼어 있고 또 한국전 후에 일어난 베트남전은 19년간이나 계속돼 한국전은 미국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한국이란 나라는 미국의 원조로 간신히 꾸려가고 있는 가난하고 작은 나라였다.     그런데 미국 각처에서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군 베테랑들이 작은 기념비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한강의 기적’으로 우뚝 서게 된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워싱턴에도 1995년 한국전 참전용사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캘리포니아에도 순수 한인들의 정성과 노력으로 (한국정부의 일부 지원도 있었지만) 작년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 올해 6·25 기념식은 OC해병전우회(회장 정재동)주최로 25일 풀러턴의 기념비 앞에서 거행된다. 미주에서 최초로 미군전사자 전원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 앞에서 그 전쟁을 상기하는 기념식이 열리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 한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미국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자리에 한인들뿐 아니라 뜻있는 타인종들도 많이 참석하기를 기대한다. 김택규 / OC해병전우회 고문·국제타임스 편집위원커뮤니티 포럼 전쟁 한국전 참전용사비 한국전 기념비 한국전 미군

2022-06-20

[기고] 참전비 준공식과 노병의 눈물

 ‘재향군인의 날(Veterance Day)’과 6·25 유엔참전용사 추모일’이었던 11일 풀러턴의 힐크레스트 공원에서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비’ 준공식이 뜻깊게 거행됐다.     이번 기념비 건립의 의미는 크다. 첫째 의미는 미국 내에서 관이나 또는 군 관계 조직의 주도가 아니라 순수 민간인, 일반 시민, 특히 한인들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기념비라는 점이다.     두번째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사자 전원, 3만6591명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라는 점이다.     세번째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없었던 남가주 지역에 한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날 준공식에 예비역 해병으로 나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한국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미해병 참전용사 한 분을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가졌다. 브라운이라는 올해 90세의 노 해병은 네바다주에서 왔다고 한다.     그는 1950년 샌디에이고의 펜들턴 해병기지에서 해병대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6월 25일 한국전이 터지자, 급히 편성된 ‘해병 제1임시여단'에 소속돼 한국전에 파병됐다. 그의 나이 그때 18세였다. 낙동강 교두보 방어작전에서 싸우다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지시로 제1해병사단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자 모(母) 부대인 제1해병사단에 복귀해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제1착으로 월미도 탈환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그 후 인천탈환 전투, 서울 수복작전을 마치고 다시 함정을 타고 원산상륙작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한국전에서 미군이 가장 고전하고, 또 10배의 적에게 포위 당해 전멸 위험에 처했던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는 세계 전사에 가장 유명한 '승리의 후퇴 작전'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도쿄의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을 과소평가하며, 계속 북진을 독촉했다. 하지만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 계곡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이미 미 해병사단보다 10배가 넘는 중공군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꽹과리와 피리를 불며 야간에만 공격해 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해병들은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더욱이 영하 30-40도의 추위가 더 문제였다. 계속 동사자가 나오고, 화기 및 각종 장비들이 얼어붙어 작동이 잘 안 됐다.     그러나 뛰어난 리더십의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의 지휘로 해병제1사단은 중공군 7개 사단을 궤멸시키고, 중공군 제9병단에게 3개월간 전선에 나올 수 없도록, 큰 타격을 주면서 무사히 흥남으로의 철수작전을 마쳤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북한 자유민을 남으로 탈출시킬 수 있게 했다.     이때 스미스 사단장이 기자에게 한 명언이 남아있다.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다.”   브라운 해병은 장신호 전투에서 동상에 걸리기도 하고, 거의 죽을 뻔한 부상도 당했지만 용케도 살아남아 이날 풀러턴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그는 치열했던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명단을 5개의 별모양 비석에서 찾아보면서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참전비 건립은, 그날 브루스 휘태커 풀러턴 시장이 말한 것처럼 한국전을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항상 기억하는 전쟁'이 되게 할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이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민족임을 미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와 함께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도 일조할 것이다. 앞으로 미국 각 지역에 한인들의 주도로  참전용사 기념비가 계속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김택규 / 국제타임스 편집위원기고 참전비 준공식 미해병 참전용사 한국전 미군 한국전 참전

2021-11-15

한국전쟁서 산화한 미군 병사 70년 만에 귀향

1950년 스무 살의 나이에 한국전쟁에 파병됐다 전사한 미군 병사가 7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4일 미시간 지역 언론은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기관(DPAA) 발표를 인용,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행방불명된 미 육군 소속 윌리엄 E.캐벤더 병장의 유해가 고향 미시간주로 돌아와 가족 품에 안겼다고 전했다.   캐벤더 병장은 이날 오후 어릴 적 살던 동네인 미시간 중부 소도시 레슬리에 있는 공원묘지의 부모님 곁에 안장됐다.   안장식에는 미 육군 소속 현역 및 예비역 장병들이 다수 참석했고, 예포로 애도와 조의를 표했다.   캐벤더 병장은 1950년 11월 28일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에서 소속 부대원들과 함께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후 실종된 것으로 보고됐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평생 기다리던 부모님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났고, 이미 팔순이 다 된 두 여동생이 오빠의 유해를 맞았다.     이들은 "오빠와 나이 차이가 10살 이상 나기 때문에 많은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오빠가 해외로 파병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알고 있다"며 "오빠의 실종은 가족 모두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고 전했다. 이어 "오빠가 하늘나라에서 부모님과 다시 만나는 생각을 하며 위로로 삼는다"면서 "유해로나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정부의 노력에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DPAA에 따르면 캐벤더 병장의 유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가진 지 한 달여 만인 7월 27일, 북한이 55개 상자에 담아 미국에 송환한 한국전 미군 전사자 유해에 포함돼 있었다.   캐벤더 병장의 유해는 한국에서 하와이 오아후섬의 진주만-히캄 합동기지로 옮겨졌다가 DPAA 실험실로 보내졌고, 인류학적 분석•정황 증거•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작년 5월 신원이 확인됐다.   한편 랜싱 스테이트 저널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인용, "한국전쟁 기간 3년 사이 최소 280만 명이 숨지거나 실종됐으며 이 가운데 3만6568명이 미군"이라고 전했다.   시카고=연합뉴스 김 현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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